본문 바로가기

학기 강좌

[현장스케치] 졸업예비학교 5강 -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는 성령과 하나님 나라 (직장인 모델) : 최태식, 심지연" (박지혜님 글)

2012년 10월의 마지막 월요일,

우리의 발걸음은 어김없이 졸업예비학교로 향했습니다.

 


다섯 번째 강의였던 이번 시간은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는 성령과 하나님나라”라는 제목으로

효성그룹 최태식 차장님과 외국계 기업에 계신 심지연 과장님께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먼저 최태식 차장님께서는 요셉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Vision”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보자고 하셨는데요,

과거에는 의사, 교사, 목사 등 한정적인 직업군을 가지고 비전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보통 ‘나의 비전’이라 함은 “미래”에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늘, 당위적으로 “비전”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포함해온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하는 것일까요?

비전이 미래적인 개념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은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수단으로서의 시간일뿐일까요?

 

“Vision”의 어원은 ‘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Vide”에서 비롯된 것으로,

매순간 만물 가운데 충만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비전”이란 “현재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단에게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 꿈을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보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비전의 사람”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할 때에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바로의 면전에서도,

오직 그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1-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죄수를 다 요셉이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 41: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은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그의 타이틀은 한낱 노예, 죄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 사람으로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여름까지 한 선교단체의 간사로 있었습니다.

어떠한 계기가 있어 사역을 내려놓게 되었는데요,

그 과정 속에서 제가 얼마나 자기의와 자기힘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교단체 간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비전과 그에 순종하는 나의 삶을 모두 대변해주는 것 마냥 살았던 것들,

‘내’가 키운 양들, ‘내’가 받은 인정,

‘나’의 고집으로, ‘나’의 계획으로 하려고 했던 것들 모두 내려놓게 하시고,

단단한 자아를 깨뜨려 홀홀단신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비록 이렇다 할 직장도, 직함도 없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지금의 제가 백조처럼 잉여롭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의 발걸음을 고민하고 공부하며 기도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도

여전히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영광의 순간이라 믿습니다.

현재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길 기도합니다.

 

이어서 심지연 과장님께서 강의를 해주셨는데요,

학부 때부터 선교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시고 졸업 후 선교사가 되리라 하셨지만,

주위 사람들의 만류와 행정을 익힐 필요성을 느끼고

선교사가 되기 전 적어도 5년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취업을 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먼저, 노동의 의미에 대해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임금노동뿐만 아니라, 육아, 공부, 놀이 등 창조에 화답하는 모든 것이 노동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동을 돈이 나오는 무언가로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본의 영향력에 포섭되어있다는 증거라는 것이죠.

 

또한 실제 삶에서 우러나오는 경험을 통하여 졸업 후 직장인으로서의

거주지 선택, 스트레스, 관계, 자기수련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알려주셨는데요,

보통 집을 정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이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곳을 선호하지만,

직장과 집이 가까울수록 퇴근시간은 늦어지고 회사가 노동을 착취할 가능성도 높아지기 때문에

직장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고,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곳에 거처를 정하는 것이죠.

 

또한 일상에 “찌든”이란 표현이 보편화될 정도로 사람들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그것을 푸는 것이 직장인들의 화두인데요,

등산, 여행, 기도원 같은 곳으로의 ‘떠남’이 없어도

일상의 몸에 밴 리듬감을 통한 전환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늘 같은 시간 출퇴근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밥상, 잠들기 전 기도모임..

이 모두가 우리의 삶을 매일 새롭게 만드는 영성입니다.

 

직장에 대해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관계문제인데요,

다양한 사람이 특정 공간에 모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곳이 바로 직장이기 때문에,

직장은 자기 인격의 한계, 모남을 직면하는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고백하는 것과 실제 삶의 괴리,

주일날 교회에서의 모습과 평일 직장에서의 모습 사이의 간극을 비춰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을 간과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만적 모습이 내면화되어

상사의 눈치를 보고 후배에게는 안하무인하게 된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한 기만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괴리를 일깨워주는 친구를 회사에 두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공동체에 자신의 직장에서의 모습을 상세히 노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직장문화를 바꿔볼테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취직을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조직의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관계, 피상적인 관계로 인해

변하지 않는 현실에 체념하여, 포기로 인한 뒷담화의 장이 생기게 됩니다.

직장 내 신뢰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체념하지 않게, 나 전체가 휘둘리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본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이 시대는 돈이 나오는 임금노동만을 노동이라 여기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직장에 올인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청춘들의 아픔, 비정규직의 슬픔, 실업자들의 비극이 이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관계적 맥락이든, 비전의 맥락이든, 의식주의 맥락이든,

직장이라는 특정영역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직장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

내 삶에서 직장이 어떠한 의미인지 찾아야 한다는 말이 많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직장 외에도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고,

자기운동의 전망 속에서 직장은

인격수련장소로서, 체력훈련장소로서, 선교의 장으로서

얼마든지 자신의 연대체가 될 수 있으니까요.

 

강의에 이어 질의응답시간이 이어졌는데요,

여러 가지 좋은 질문들과 답변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적어본다면,



물질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돈 앞에서 당당한 사람,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관계 앞에서 당당한 사람,

불안이 가득한 직장 가운데서 주변인들에게 안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나의 직장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땅끝까지 전하는 선교사의 삶인 것 같습니다.

 


창 41: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