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 11. 08. 화 모임사진 : 정인곤간사님, 이성호, 박재훈, 유재홍, 김겸손, 이하영
"우리 이런 책 공부해요!!"
# 모일날짜
2011. 11. 15. (화)
# 함께한 사람
정인곤간사님, 박재훈, 유재홍, 김겸손, 이하영
# 밥상교제
간사님, 재훈오빠, 재홍이, 하영 그리고 오늘은 박지혜언니도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 먹으며 지혜언니한테 10년 동안 대학교 선교단체 간사로 섬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대답은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 생활 나눔
재홍, 요즘 대학들이 대학평가에서 점수를 잘 받아 부실대학 신세를 모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데요.
재홍이네 학교에서도 갖가지 장학금을 주는 데 자기추천 장학금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홍이도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쓸까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재홍아 1/n 어때?)
재훈오빠, 진로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정인곤간사님, 재훈오빠에게 과연 자신이 원하다고 하는 것이, 선택하는 것이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이 그것을 원하거나 선택할 수도 있다고 했죠.
겸손, 요즘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사회복지연대에서 간사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동안 자신을 잘 알았던 사람 - 선배, 선생님들은 지금 하는 일이 그동안 내가 해왔던 말들과 맞지 않다고 한다.
내가 사회복지를 생각하고, 사회를 이해해왔던 것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의 반증이 아닌가?
그리고 정서적으로 스스로 해결안되는 부분들도 있다.
무의식 이야기하면서 이런걸 선택하게 된 것은 욕망, 무의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를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
진로를 선택하는 것도 신앙인으로서의 소명, 가치 있는 것을 잘 선택하고 싶고 그렇다 생각하는데
결국 나를 더 크게 움직이는 것은 나의 저변에 깔려 있는 욕망,
그렇다면 이 욕망을 내가 잘 포착하고 바꿔낼 수 있고, 이게 가능한 건가?
이것이 생각으로 발견가능한가? 아니면 현장에서 부딪혀야 하는 문제인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욕망, 그것을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성찰해야겠다.
그렇다면 그 무의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실증할 수 있는가? 라고 질문.
정인곤간사님, 한 사람의 자기의식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의식이 아니면서 어떤 경향성이 있는 것)이 결정한다.
그리고 맑스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택, 일상이라는 것은 사회적 배치, 물적 토대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자기의 계급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화가 필요하다.
즉, 맑스와 프로이트의 문제의식은 주체가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자본주의 사회로 가져오면 선택은 자본주의 욕망, 자본주의와 욕망의 배치가 결정한다.
이 욕망에 근거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보다는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선택을 한다.
즉, 자본주의 욕망 안에서 무언가를 선택한다.
현대철학에서는 욕망을 재해석, 왜 욕망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하는가?
그것은 프로이트에게 상담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져온 욕망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었다.
부정적인 욕망 중 쉽게 말할 수 없는 것, 성적인 것이어서 무의식의 핵심은 거의 대부분은 성적인 것이라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현대철학은 긍정적 욕망이 있다고 생각 - 라깡 등, 6・8혁명을 경험하면서 당시 자본주의가 첨단화 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돈, 경쟁에 매여 있었다면 이를 전복시키는 힘을 보았다.
프로이트는 파괴시키는 욕망을 주로 보았는데 현대철학은 욕망에도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계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성의 기능을 공부하는 것은 공부하려는 엄청난 욕망이 발생한 것이고
이 욕망은 기청아라는 관계배치의 물적토대가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을 둘러싼 시간, 공간, 관계 등의 물적 토대가 (사람관계, 주거환경, 교통수단, 거주 지역, 역사적인 것 등)
그 사람의 욕망을 결정한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생각을 바꾼다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이란 하나의 경향성이 중요한 영향을 주지만 결국 이것도 물질적 토대를 바꿔가는 형태로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도 물질적 토대의 변화를 동반한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한다는 것도 물적 변화를 바꿔가는 형태로 심화된다.
물적 변화로 정신적 변화를 만들고 이것이 다시 정신적 변화를 이루고......변화는 어떤 형태로든 물적 변화를 수반한다.
한 사람이 무슨 욕망을 가졌는가? 좋은 욕망을 가졌는가? 나쁜 욕망을 가졌는가? 이런 건 없다.
모두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질문하는 사람도 질문 받는 사람도 모두가 자기가 검열 받는 존재로만 있지 않고 동시에 세상을 해석하는 존재로 있게 된다.
질문을 받는 존재이며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으로 있는다.
니체는 모두가 권력의지가 있다. 말하고 있는 사람이 “김겸손 이래”라는 규정은 지식권력이다.
‘내가 김겸손을 잘 못 알고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현재의 모습으로 과거의 김겸손을 재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선 이해를 고정시키고“김겸손은 이상해” 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권력의지 즉, 지식권력이다. 니체가 말하는 것은 왜 자꾸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느냐는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진리를 관철시키길 원하는 거지? 라고 니체가 묻는다. 니체의 성과다.
결국 진리, 지식이라는 것은 따로 있지 않고,
내가 원하는 세계를 구축해 갈 수 있다.
내가 계속 바뀌어 가는 것, 현대의 주체는 투쟁하는 주체,
사회적으로 많이 규정되어 있는 사회적 선 이해들을 격자라고 하는 것을 가로지르는 투쟁하는 주체이다. 사건의 철학에서...
원래 지식이라는 것은 없다.
이 투쟁에서 누가 우세하느냐의 차이다.
일단 패기를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나의 변화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날 나의 글쓰기를 보는 것, 글을 쓰는 것은 의식적 행위지만 동시에 무의식이 있는 것.
이런 것들로 한 사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으로 한 사람을 확정할 수는 없으나 하나의 근거를 마련할 수는 있다.
또 하나는 나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에게 나의 변화에 대해서 듣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나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권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 말고,
현재의 나의 모습을 기준으로, 일상을 공유하며 과거의 나의 모습을 재해석 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
나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듣는다.
그러나 최근에 작용한 어떤 강한 힘이 있는데
그 힘의 작용으로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고 과거의 축적으로만 나를 보는 것은 이미 화석화 된 삶.
과거의 축적으로서 완벽한 방법론으로 인생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잠시, 맹목, 리듬의 형태로 사는 것이고 생명성이 퇴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있는 강한 흐름을 긍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무언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이 흐름으로 판단을 할 수 있고 이게 좋은지 나쁜지는 모른다.
그리고 이것을 안다고 하는 것도 웃긴 일이고, 그래서 관념의 모험이다.
#『이성의 기능』제2부
발제자 : 김겸손
이 글에서는 이성을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으로 나누어
어떤 식으로 사변이성이 무언가를 구성하면서 실천이성화가 되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완고한 독단주의에 빠지는 게 되는 지
어떤 측면에서 관념의 모험이 필요한지가 2부의 내용이다.
화이트 헤드는 인간의 관찰, 측정을 중요시 여긴다.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이성의 기능의 핵심은 이성의 기능이란 삶의 기술 증진이고, 곧 상향이다.
상향과 하향이 있는데 상향은 어떻게 되냐 곧 인간학 적으로 이성의 기능을 통해서 된다.
이성의 기능엔 두 가지가 있는데 사변이성과 실천이성이다.
당장 취업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구축해 가는 것은 실천이성,
그렇지 않고 갑자기 이 순간에 도대체 이 사회가 사람 살 사회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갑자기 사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사변이성이다.
이 때 주위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듣는데 이 핀잔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관념의 모험을 하는 사람이 있고,
이 핀잔에 사변이성을 꺾고 피곤함을 느끼며 실천이성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더 나은 삶, 세계에 대한 이해는 해석되지 않은 구체적 일상의 경험들을 해석함으로 가능하다.
추상적 관념은 한 번 구축이 되고 이를 통해 하나의 방법론이 구축되는데 구체적 경험으로부터 하나의 관념이 구축되기도 한다.
그래서 해석되지 않은 일상적 경험이 중요한데 그것은 해석된 경험은 이미 구축된 것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헤드는 17・18세기의 관찰, 측정은 근대의 가장 좋은 습관이었고, 근대 초기 사람들의 이런 걸 긍정한다.
물론 완고한 독단주의에 가기 전까지 만이다.
화이트헤드는 새로운 우주론의 구축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존에 있던 이분법적인 우주관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일상적 경험들이 있고,
이 해석되지 않는 경험들을 예외라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이 해석되지 않는 경험들까지 해석해 낼 수 있고,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우주관을 구축해야 되고 그것이 유기체적 우주관이다.
여기서 하나 더 “새로운 형이상학의 정식화 작업”이란 말이 나오는 데
이것이 세계를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우주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내가 가진 세계관으로는 보지 못했던 세계가 있다.
그리고 내가 도대체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따라서 그것을 보기위해서는 자기를 객관화해서 보아야 한다.
이것을 통해 내가 놓치고 있었던 일상적 경험들에 주목해야 되고 이 경험들을 해석해 내야 한다.
이 해석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해야 된다.
물론 이런 일들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미 우리는 이 일들을 해왔다.
개인, 사회, 지구공동체도 이 일들을 해 왔다.
7살 때의 나, 17살 때의 나, 현재 27살의 나를 비교해 보면
내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분명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역기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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