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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강좌

[현장스케치] 7주차 '기독교 세계관 생태' (서희선님 글)


7 주차 기독교 세계관과 생태 강의가 있었습니다.

고려대 학생식당에서 맛있는 식사 후 7시에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엔 기존 강의실과 달리 큰 강의실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 듣는 서로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참 좋았는데 이번엔 찬양을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였지요~ ^^

강의는 장철순 간사님의 기도로 시작 되었습니다.




생태하면 대부분 환경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환경 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태란 무생물이던 유생물이던 보이던 보이지 않던 간에 얽혀 있는 그물망으로 상호소통하며 작동하는 구조 입니다. '다양한 사귐' 들의 유기적 관계성이자 집합.

 

생태=사귐(핵심단어입니다)

피조세계 창조도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하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귐!

그리고 나와 하나님의 사귐

나와 자신과의 사귐

나와 타자(이웃)와의 사귐

나와 피조세계와의 사귐

- 피조세계란 눈에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치, 경제, 문화 포함 됩니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둘 다 동일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생태계안에 죄가 들어와서 유기적 관계성이 왜곡되었습니다. 오늘의 문제제기는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 되었는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유기적으로 회복할 것인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짐이 나와 이웃, 피조세계까지 왜곡이 됩니다.


생태에서 중요한 것은 '생태적 감수성' 입니다.

생태는 나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문제가 나의 문제로 여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생태적 감수성 입니다. 정서적 맥락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떠한 근거로 문제인지 분석해야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내가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프리카 사막을 가속화시키고 제 3세계 국가에 아이들이 굶주린다는 연관성이 있다는 것.

근본적인 나의 책임이라고 느끼는 것 입니다. 결국 이웃의 개념이 무한 확장 됩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사를 안 받고 아벨의 제사를 받았을까요?

가인과 아벨 시대는 율법이 중요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제사를 드렸지만 제사에 상관 없이 하나님의 마음은 이러하였습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믿음이 뭐냐?

가인의 삶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사 지내기 전의 '가인의 삶' 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제사라는 종교적 행위를 정성스레 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평소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냐 가 중요합니다.

그럼 순종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가인은, 네 아우가 어딨냐? 했을 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다" 라고 합니다.

아벨을 죽여놓고 책임회피를 합니다.

한 순간 실수가 아니라 죄가 쌓여서 그렇게 된 것 입니다.

어떠한 존재가 나와 상관 없다는 책임 회피!


1. 지구 반대편 사람이 죽어가는 것

2. 가인이 아벨을 죽여놓고 '아우를 지켰나이다' (책임회피)


위의 두 가지가 같은 것 이라 하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같을까요?

가인이 찔려 죽여 놓고 책임 회피나, 내가 창조원리대로 살지 못 해 어느 누군가가 고통 받는 것이 가인과 같은 것입니다.

나로 인해 어느 타인이 고통 받는 것 입니다. 이건 매우 강도가 깊은 이야기 이며 불편한 진실 입니다. ㅜㅜ

일상 가운데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장 지블라의 탐욕의 시대 라는 책 추천 하셨습니다.

제 1세계 사람이 제 3세계 사람들을 어떻게 착취하는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우리는 전 세계 10% 상위에 속해 있는 것 입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다만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이며

누구는 미국에, 누구는 잠비아에 태어난 것 입니다. 어디에 태어났느냐로 일생이 달라집니다.

겨울인데 겨울 같지 않은 이상 기온을 두고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이상히 여기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자연과의 사귐이 왜곡된 것 입니다.


기본적으로 중요한 정사와 권세의 사귐이 중요합니다.

권세는? 보이지 않는 다스리는 힘 입니다.

권세는 에베소서 6장에서 잘 나오죠.

권세는 원래 선한 것 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힘!

그러나 악한 권세로 왜곡 되었습니다.

권세가 어떻게 이 땅에 작용 하는걸까요?
 
1. 정치, 권력 2. 경제 권세 3. 미디어 권세(예: 나는꼼수다) 4. 문화적 권세(빼빼로데이,

조윤하목사님의 빼빼로데이 글 참조^^ )


나와 피조세계 와의 사귐. 어떻게 노예가 되고 또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의와 평강과 희락의 관점을 강조 하셨습니다.


눅 4:16-18 말씀 읽어보았습니다.

김진숙님이 한진중공업 트레인위에 올라가있다가 체결되어서 내려왔는데 "그게 나와 뭔 상관?" 할 수 있습니다.

눌린자에게 자유를~ 부분이 개인 신앙적 뿐 아니라 피조세계와의 관계 회복에서도 적용이 되야 합니다. 총체적으로 봐야 합니다.

이 땅의 피조물들이 왜 그리 아파할까?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던 메카니즘이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를 보고 '마음 아프다. 안타깝다' 라고 감정적이기만 했습니다만 이번 강의를 계기로 깊이있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 그 동안 교회에서 왜 이런 부분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휴우, 앞으로 바쁘게 살고 싶습니다. 문제 의식을 느낀 이상 조금 이나마 치유와 회복에 보탬이 되고 싶기 때문 이지요.... ㅜㅜ)

생태적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가 과제 입니다.

한 여자가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의 질문이 됩니다.

노동이란 거룩한 것인데 그런 노동이 왜곡된 현실입니다.

참된 사귐에 대해 보았습니다.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 하느니라

이 말씀을 두고 어떤 이는 교회에 몸 된 지체만 해당하는거 아니냐?

제 3세계의 고통이 왜 함께 해야 할 고통이냐? 안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 되느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끼리 짝짜꿍하는 그런게 아닙니다. 흩어지는 교회 맥락 입니다.

근본적인 교회 확장, 하나님나라의 확장이 되는 겁니다. 전인류적으로 확산되기 위한 선교적 과제 입니다.

복음을 단순히 언어적으로 전하는게 아니라 유기적 원리로 확장하기 위함 입니다.

와우!


저는 빨간 글씨로 강조 하고 싶은 부분 입니다. ccc 사영리로 들이밀면서 "영접 할래? 안 할래?" 하는 복음 전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서로 유기적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삶으로 선교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건 참 신기합니다.

내 존재에 대한 무한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아까 가인과아벨 이야기에서 책임회피가 나왔으나 지금은 무한책임이 나오죠)

무한 책임 이란, 내가 빵 하나를 먹더라도 단순히 "아 맛있다" 라고 먹는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사고 하고 전 지역적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야 합니다. ^^)

나의 죄가 타인에게 고통이라면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역발상으로 나의 치유가 타인에게 동일하게 회복되는 것 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봐야합니다. 그래서 사귐은 중요합니다.


목사님께서 예전에 노숙자 사역하셨는데 처음엔 노숙자를 개인의 문제로 여겼으나 그 사람이 그렇게 되기 까지의 삶의 과정을 쭉

들어보니 노숙자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하셨습니다.

고려대학생이었다 시위하다.. 고문당하고 군대 강제 징집.. 삶이 꼬여버린.. 그 노숙자의 지나온 삶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어떤 한 개인의 문제로 보이는 것이 결코 그렇지 않음이 확 와닿았습니다.


그외에도 경제 권세로 인해 가정이 깨짐이 일어납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 한 아이는 문제아, 일탈을 하게 되고 연쇄적 균형이 됩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나와 피조물 과의 관계 맺는데 긴밀한 관계가 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 있어 부모의 욕망이 과도하게 자녀에게 투사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가정에서 중요한 나의 의미가 확인이 안 됩니다. 부모의 관심이 자녀의 관심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엄마 아빠가 자식을 압박 하게 되고 그럼 하나님 앞에 주체적으로 '은사와 소명'을 발견하지 못 합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바라는 어떠한 상이 있고 그 바람 자체가 나쁜게 아닙니다. 부모라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비주체적으로 반응하는 자녀도 문제가 있습니다(심히 공감 되더군요)

그 과정을 건전하게 잘 뛰어 넘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정서적, 경제적 독립된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합니다.


또한 마무리 하면서 말씀하신 것

질문하는 습관을 갖으라 하셨습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됩니다. 특히 '왜' 라는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근력 운동! 문사철, (문학, 역사, 철학) 즉 인문학을 배워야 합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분석하는 역량, 점검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은 가볍게 여기고 보이지 않는 것에 심오히 여기며 내 삶을 던지는 것 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 깊은 평안이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와 어떤 교회와 함께 하는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청아 강의 들을수록 공동체 결핍증 ㅜㅜ 현기증 나네요)


다음주는 8주차로 마지막 강의 입니다. 의식주의 구체적은 부분에 대해 다룬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기대 됩니다 ^^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띵 했던 '생태' 강의 후기를 마칩니다!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내야겠습니다.

기독교세계관 강의 후 뒤풀이모임 사진 입니다 ^^^^

목사님께서 기독교세계관 심화과정을 기획 중 이십니다. 그 때 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