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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강좌

[현장스케치] 바울서신 연구, 마지막 시간 (황종현님 글)




어느 때 보다 강의실이 꽉 차게 느껴졌던 마지막 날, 다른 날 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노트를 펼치고 그간 들었던 강의 내용을 훑어 보았다. 노트 첫 페이지의 귀퉁이에는 “10 10 2시간 지각이라고 메모가 되어 있었다. 이날 일하는 연구소에 긴급 상황이 생겨 늦게 서울역에 도착한 것도 모자라 건물을 한번에 찾지 못하고 헤매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러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천에서 서울역까지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은 당시 가지고 있던 신앙적 고민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온전한 크리스찬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좋은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크리스찬이라면 꼭 한번은 해봤을 법한, 어쩌면 너무나도 기초적인 고민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기초를 배우고자 바울 서신 연구를 듣기 시작했다.

나는 부끄럽게도 크리스찬 6년차인 초신자다. 아직은 세상의 방법과 섭리가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술자리에서 취중진담에 의존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크리스찬의 모습으로 관계를 맺는 것보다 자신이 있다. 하지만 다행히 적어도 지난 6년 동안은 이런 익숙함과 싸우며 나름대로 관계의 재편을 경험하였다. 문제는 이 재편이 너무 어설펐다는데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시작한 것 중에 한 가지는 친구들과 놀지 않기였다.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음주가무를 매우 좋아한다. 나 역시 그러하지만 크리스찬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목적과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신앙적인 부분들이 있어 친구들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를 새롭게 크리스찬들과 관계를 맺음으로 채우기 시작했고 결국 대부분의 관계는 크리스찬들과의 것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서부터 나의 고민이 시작 되었다. 내 주변에는 너무 크리스찬만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신자를 적대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원인은 간단했다. 이전 나의 모습이 아닌 새사람의 모습으로 불신자와 관계를 맺는 것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아 방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던 당시 새로 연구실에서 일을 할 예정이었던 터라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장 다가올 새로운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그런 실천적 불신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 내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간절하던 때에 몸담고 있는 교회에 한자매가 바울 서신 연구를 들어보지 않겠냐며 권유했다. 바울이 담대하게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던 것을 배우다 보면 어떤 구제적인 방법들을 배울 수도 있겠다는 기대로 지체 없이 그 다음날인 월요일부터 듣게 되었다. 내가 들은 강의 수는 총 6회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 중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첫 나눔 시간은 목사님과 갖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나의 고민을 상당 부분 털어놓았다. 목사님께서는 신앙을 갖고 관계 재편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 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재편을 경험하였는데 왜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일까? 불신자인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 하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단순하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무 분별없이 맺었던 것이 이유인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주위에 교인들은 많아졌지만 정말 서로의 삶에 신앙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강한 관계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으로 우뚝 서기 위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며 함께 중보하고 서로를 점검해줄 그런 관계가 없었던 이유로 나의 고민이 시작된 것임을 이렇게 배우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왜 그토록 신앙의 관계에 목말라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던 순간이었다.

문제를 알고 난 후 현재 나의 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새로 맺은 여러 관계에서 심각한 공통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 관계들은 모두 방어적인 관계였다. 방어적이란 신앙인들간에 마찰을 피해야 한다는 핑계로 관계에 있어 상대방에게 전심을 다한다면 해주어야 할 껄끄러운 말과 행동은 지나치게 과감히 삭제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문제를 서로 모른척하며 그저 관계를 깨지지 않게만 유지하려는, 즉 전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그런 관계들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관계에도 목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관계들이 몇몇 모여 모임을 이룬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 모임에 머릿수만 채웠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관계에 있어 한없이 수동적인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건강한 관계에 목마른 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매주 월요일, 특히 소모임 시간이 너무 기다려 진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에는 그 어느 때보다 나의 신앙적 고민을 털어놓고 다른 지체들의 나눔을 통하여 어느 정도 해답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 말이 많지 않은 나도 마음껏 신앙적 수다를 즐길 수 있어 너무 감사했다. 마지막 날이 그래서 참 많이 아쉬웠다.

이날 강의 중 목사님께서 관계를 시간을 내어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돌아와 핸드폰에 전화번호부를 열었다. 168명이 그 안에 나열되어 있었다. 이 중 세상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 15, 신앙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8, 신앙적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 5, 연락하지 않는 사람 70, 서로 신앙적 점검을 하고 있는 사람 0명 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숫자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섬긴 역사가 짧다는 핑계로 언제나 초신자에 머물지 않았나 생각된다. 신앙을 갖게 된 후 6년이 지난 지금 바울 서신 연구는 나의 신앙이 비로소 원점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출발하려 몸을 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감사하고 수고해 주신 목사님과 함께했던 지체들을 축복하며 앞으로 경험하게 될 성장의 시간들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드림으로 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