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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강좌

[현장스케치] 기독교세계관 특강- 5. 기독교세계관으로 본 치유와 회복 (박지혜님 글)

 

2011. 10. 31.

 

그 유명한

시월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어김없이 기독교세계관 특강을 들으러

강의실에 모였습니다.

 

이번 주제는 '기독교세계관으로 본 치유와 회복'이었어요,


 

'치유와 회복'은 '상처와 파괴'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미 죄가 들어와 태초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이 땅 가운데,

'치유와 회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씀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답니다.

 

 

여기서 치유와 회복은,

개인의 내면세계와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치유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조윤하 목사님께서는 노숙인 사역을 하시면서

그들의 고통에 대해 눈뜨고, 깊이 이해하시며,

 

어떻게 이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고민하셨다고 해요.


즉,

치유와 회복이 있으려면

고통에 대한 민감함  죄에 대한 민감함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여기서 멋있는 정의 하나.

"예술이란 타인의 고통에 지극히 민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슬프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그림과 노래와 이야기들을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들도

느끼고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생각도 해보았답니다,

제 생각이에요 :)  

 

 

우리는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나님,

제가 왜 이런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까,

나에게 왜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은총이고,

고통에서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문제로 넘어선다면,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그 가운데 그들의 치유자로 쓰임 받게 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큰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또한 치유와 회복은 관계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는데요,



내가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하는가가

관계 가운데 파악되고

관계 가운데 드러나고

관계 가운데 해결되어 가는 것을 목격하는 과정 속에 치유가 일어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하겠죠?ㅎㅎ 

 

왜 우리도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을 할 때

서로 친밀감을 느끼고 가까운 사이가 되잖아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하나님의 고통에 내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느냐에서부터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고통에 귀기울이고 계시니까요.

 

출애굽기 3장 24~25절,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면서

인간은 분열된 양상을 보이게 되었어요.

 

따라서 잘못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해 '왜곡된 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분별력 있는 내'

자각되고 분리되어 생각되어질 때

비로소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습관' 때문에 어려워요~

쉽지 않아요~

 

우리는 그러한 분리를 경험하며 고통을 느끼게 돼요.

 

예를 들어 우리는

"키가 작다"라는 사실(Fact)에

"부끄럽다"라는 가치판단이 저절로 작동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나의 일부인 것처럼 내면화되어 있어요.

 

곧,

"키 작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가 나를 좌지우지하고

거기서부터 상처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키 작은 사람 혼자만 있으면

"키작다=부끄럽다"는 성립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상처와 파괴', '치유와 회복'은 "관계적 문제"인거에요. 

 

상처될 만한 것이 아닌데 왜곡된 세계관으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치유의 근본이고,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이야기해줄수 있는 관계,

신앙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신앙공동체 내에서만큼은 세상적인 가치관이 회자되어지지 말아야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들이기 때문에ㅜ

 

세상의 조류를 거스르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교회 내에서도

형제들은 "young & pretty"한 자매를,

자매들은 "tall & rich"한 형제를 찾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ㅜㅠㅜㅠ

 

그런데 어렵다는 이유로,

이 세상의 세속적 가치가 나에게 그냥 흘러 들어오게끔 내버려두고,

그로 인해 상처입고,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것은,

"게으름"이라고 하셨어요. 

 

치유는 게으름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구요.

 

이 세상은 죄 가운데 영혼이 상처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경고체계까지 마비시켜버렸어요.

 

그 경고체계는 '율법'인데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율법과 마주하는 것은 참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 거에요.

 

이게 다 "게으르기 때문"이에요.

 

또한 게으름 뿐만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낯선 것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봐-

내가 소중하지 못한 존재임이 드러날까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을 때 감내해야 하는 고통들이 싫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두려운 거죠.

 

 

저 역시 세상의 물결에 편승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것을 좇으려고 할 때가 많음을 고백해요.

 

이렇게 연약하고 게으른 나 자신을 보면 절망스럽기 짝이 없지요,,

그러나 저는 비록 절망스런 죄인이지만,

소망의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일상을 공유하고 있는 투명한 관계 속에서 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견되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종된 지체들의 권면으로 이어질 때,

 

자기 객관화의 기회를 갖게 되고,

불편함과 낯설음을 직면, 수납하고,

영적 성숙의 문제로 이어져 치유가 시작된다고 하셨어요.

 

 

'변화' 즉 '거듭남'을 "은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나를 초월한 타자에 의해 밖에서부터 안으로 기회가 들어와

자기성찰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고,

그만큼 변화는 장기간에 걸쳐 힘들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나의 고통에 오래도록 함께 아파해주고

내가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누군가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유와 회복의 충분한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면 은사와 소명도 함께 발견되어진대요!!

 

거듭난 나의 자아를 확인하면서

태초에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나에게 주신 본래 은사가 발견되기 때문이죠~

 

한 사람에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은사와 소명이 발견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함께 체험하는 공동체야말로

참된 신앙공동체인 것 같아요,

 

그 점에서,

저는 참 좋은 공동체에 있다는 생각이,,

:)

 

 

개인적으로,

조윤하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셨던

"연애를 하면 자신의 바닥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치유와 회복이 많이 일어난다"는 말씀에 공감이 되었어요,ㅎㅎ

 

사랑은 나와 상대방이 영적으로 내면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의지가 발현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헌신이 필요한 것 같아요.

비단 남녀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을 헌신을 수반하는 것인데,

우리 사회는 헌신이 빠져버린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자녀에 대한 헌신이 빠져버린 부모,

학생에 대한 헌신이 빠져버린 학교,

소비자와 노동자에 대한 헌신이 빠져버린 기업,

한 죄인을 인내하고 영접하는 헌신이 빠져버린 교회,

 

그래서 세상 곳곳이 상처나고,

신음하고, 울부짖고,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나봐요ㅜㅠㅜㅠ

 

저도 아직 성숙하지 못할 때에 연애를 하면서

(물론 지금도 그닥 성숙한 건 아니구요, 그래서 연애를 못 하고 있답니다ㅋㅋㅋ)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고 싶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영접하지 못하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헌신이 누락된 저의 모습에, 그리고 상대방의 모습에

철저하게 실망하고,

한없이 이기적인 죄인된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저는 입술로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본질은 사랑받기만을 원하고, 섬김 받기만을 원하던,

자기자신만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더라구요.

 

그런데 자신만을 사랑하면서 이기적으로 살면 행복해야될거 같은데,

행복하긴 커녕 너무나 고통스러운거에요.

 

고통 속에 죄인된 나를 발견하고,

이러한 죄인도 존재자체로 영접해주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

저는 더이상 이기심으로 고통스러워하지도,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로워하지도 않게 되었어요!!

 

그리고 사람은 내가 사랑을 갈구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임을 깨닫고,

나를 온전히 채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어요^^

 

저 같은 죄인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회복 시켜주시고,

주의 뜻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고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찬양드려요♡ 

 

 

너무 긴 것 같은데,,,

 

참고 읽어주신 분들,

감사하구요^^;;

 

특강 들으시는 모든 분들

주께서 이루어가시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다음주 장철순 간사님의 '우정과 연애' 강의도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려봅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