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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강좌

[현장스케치] "한국교회사 특강" 세번째 시간 - 등 돌리는 사람들, 손 내미는 교회 (손효준님 글)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19:35~21:30 가향교회 2층 강의실.
양진일 목사님 강의. 

3강. 교회의 애국운동과 사회개혁활동들
       : 항일운동과 일제로부터의 수난
 
 
1. 3.1운동 거치며 소심해진 교회

  1919년, 3.1운동이 대실패로 끝나자 교회는 트라우마를 짊어집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교회가 불타면서까지 끝날 줄 몰랐고, 그렇게 믿었던 미국이 설마(?) 안 도와줄 줄 몰랐던 것이지요. 국제정세에 무지 했습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일본의 식민지인 우리가 해당되지 않는단 사실을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교회는 2가지 방향전환을 합니다. 첫째, 교회 내로 모든 에너지를 집약합니다. 대사회적 활동을 접고, 움추러듭니다. 둘째, 세속에 희망을 두지 않고, 모든 희망을 내세에 둡니다. 이른바 타계신앙이지요. 길선주, 김익도 같은 사람들이 부흥사로 활보하고 다녔던 건, 그런 연유입니다. 

  왜, 3.1운동 때, 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요? 1919년, 전국적인 망을 가진 거의 유일한 조직은 기독교였습니다. 다른 조직은 미국과 같은 강한 외세와 연결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체되고 말지요. 교회야말로 전국에서 단시일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독보적 단체였습니다. 

  왜, 1919년 일까요?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눌려있던 분노가 폭발한 겁니다. 명성왕후가 시해당한지 24년만에, 조선 민중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것이지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처, 울분이 있었을까요. 1915년 일제사립학교법 제정으로 "학교에선 무조건 일어만 사용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졸지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레 해왔던 한국어를 빼앗기고, 남의 나라 언어를, 그것도 억지로 배워야 했던 것이지요. 미션스쿨에선 예배도 못 드리게 합니다. 불만이 여기저기서 서서히 고조될 수밖에요. 그러다, 고종의 독살설을 계기로, 민족의 한(恨)이 역사의 한복판으로 솟아오른 겁니다.


2. 지식인, 한국교회를 비판하다

  이광수는 한 잡지에서 기독교 신앙의 유익을 말했는데, 불과 4개월만에 동일 잡지에서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이를 계기로 지식인들의 기독교 비판은 봇물 터지듯 쏟아지지요. 근거없는 비판이 아닌, '이유있는 비판'이었고, 본질이 아니라 '현상비판'이었으며,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권면'하는 거라 이광수는 말했지요. 이광수는 4가지 논거를 들어 교회를 비판합니다.

  첫째, 교회가 계급적이다. 조선의 유교적 가부장제를 타파한 교회가 새로운 계급, 목사-장로-집사-성도를 만들고 있다.

  둘째, 교회는 교회지상주의적이다. 쉽게말해 이원론인데, 교회만 선하고 세상은 악하고, 찬송은 선하고 가요는 악하고 하는 식이다. 교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모든 걸 이분법적으로, 교회 아닌 것은 모조리 악으로 규정해버린다. 6일 동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7일째 안식하러 교회가는 게 옳지 않은가. 그런데 교회는 6일 동안 세상일에 찌들어 살다가 7일째 예배 드리러 간다고 말한다.

  셋째, 목회자가 무식하다. 목사가 신학교육을 통해 받는 교육이 너무 얕다. 평양신학교만해도 1년 중 3개월 신학공부, 9개월 실습하는데, 공부하는 기간이 너무 짧다. 요즘의 신학교 커리큘럼을 보면 인문학에 대한 기본 교육조차 없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공부도 없다. 2013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주류 문화와 가치에 대한 학습도 없다. 단지 6개 정도되는 신학분과를 겉핥기 식으로 공부할 뿐이다. 이렇게 배워도 논문 1편을 쓰는 것과 맞먹는 설교 1번을 제대로 하는 설교자 찾기가 힘들다. 

  넷째, 교회가 미신적이다. 기도만능주의로 인해, 몸이 아플 때 병원 안가고 기도해서 나으면 믿음있는 거라 생각한다. 신앙이 문자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거라 착각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병원 가는 순간 불신자로 치부해버린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의학과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왔는데, 이를 무시하는 처사다.

  이런 이광수의 4가지 비판에 견주어, 지금의 교회는 어떠한가 물어봅니다. 여전히 교회가 이런 비판을 받고 있지 않은가요? 어찌보면 도올 김용옥의 선구자가 이광수인지도 모르겠네요. 비판의 원인을 교회가 제공했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던 키프리안의 말을 지금 한국교회가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교회 때문에 실족하고 떠나가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입니다.


3. 사회주의자들마저 교회에 등 돌리고...

  한국사회 초기,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동휘, 김규식, 여운형, 이제복, 최문식 등이 목사나 크리스찬으로 활동했지요. 이들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적 신념'을 대립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현재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자본주의친화적 기독교'입니다. '자본의 가치'와 '교회의 가치'가 거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남한교회가 북한교회를 볼 때, 아니면 북한교회가 남한교회를 볼 때, 이런 말 하지 않을까요? "이게, 교회야?" 여기서 질문 하나 던져봅시다. "기독교 신앙이 자본주의에 가까울까요? 사회주의에 가까울까요?"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교회 권사님에게 물어봐도, 99%는 '사회주의'라 답합니다. 무엇이 낯선 풍경입니까? 자본주의+기독교? 사회주의+기독교?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진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면, 자본주의 문화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자본의 물량주의에 물든 건 아닐까요? 교회는 클수록 좋다는 신념으로 큰 교회는 더 큰 교회를 지향하고, 작은 교회의 꿈은 큰 교회가 되는, 결국 모든 교회의 비전이 큰 교회로 수렴되는 기현상을 예수님은 낯선 얼굴로 바라보시겠지요. 

  1925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자들은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겁니다. 자본의 논리를 옹호한다는 거지요. 로마서의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어구는 어느새 신앙인들을 현실순응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로부터 벗어나기위해 발버둥치는, 민족독립 하려는 사람들 발목을 붙잡고 의지를 꺾는 게, 기독교인들이었던 것이죠. 7~80년대, 그 암울해던 시절까지도, 교회에서 목사님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설교를 합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들은 말합니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다!" 침묵은 약한 동의를 뜻합니다. 불의에 잠잠한건, 불의를 인정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위에 있는 권세와 사이좋게 손 잡아온 기독교였습니다.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이 그들의 생존방식이었습니다. 로마서의 본의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사자와 일꾼들이 통치자, 너희다, 이런 부담감을 안겨주는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이 가장 의지하는 곳이 '교회'지요.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떠납니다. 뒤도 안돌아보고 말이죠.


4. 교회의 나라사랑 운동

  이번엔 교회의 애국운동에 대해 공부해보지요. 기독교가 들어온 초기, 한국교회의 특징은 ① 반봉건의식, ② 자주의식, ③ 항일의식이었습니다. 첫째, 반봉건의식은 신분제와 가부장제 타파에 기여한 데서 비롯되지요. 여성들이 가장 먼저 교회문을 열고 들어올 수밖에요. 영동교회에선 천민들이 3회 연속 장로에 선출되요. 당연히 천민출신이 교회의 주류니, 교회의 비주류였던 양반들은 연속 낙방하는 거지요. 이에 양반들은 반발하고 영동교회 문을 열고 뛰쳐나가 문동교회를 만들어요. 양반들은 천민들과 도저히 형제자매로 함께할 수 없었던 겁니다. 반면, 강화도 홍의교회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다"란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이행해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이름까지 바꿔요. 예를 들면, 홍의표, 김지석이란 사람은 원래는 남남인데, 교회에서 '한 가족'이니까 '한 부모' 밑에서 '한 성'을 써야하니 '믿을 신'자를 써서 홍의신, 김지신이라 개명해요. 당시 홍의교회에서 유행했던 돌림자는 '믿을 신(信)', '한 일(一)'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개화꾼'이라고도 불리고, 실용적인 검은옷을 입고다녀서 '검은개'란 별명도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 항일의식과 자주의식은 같이 갑니다. 성경을 보는 순간, 항일/자주의식이 고양될 수밖에 없는 것이,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은 '조선의 독립/해방'과, '바로'는 '일본천황'과, '히브리민족'은 '한민족'과 너무나도 쉽게 오버랩되지요. 어쩌면 성경을 읽는 한국인들은 출애굽기 자체를 현재화해서 받아들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독립협회가 1986년 건립되는데, 초대회장은 이완용이었어요. 이때의 '독립'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이기보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1907~1908)은 우리가 일본에 진 빚이 당시 돈으로 1,300만원 가량인데, 빚을 갚아야 한다. 갚지 못하면 나라가 넘어간다는 위기의식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남자들은 금주/금연하고, 여자들은 끼니를 정해 굶었지요. 이때, 교회가 적극적으로 운동을 주도해서 231만원 가량 모았습니다. 일제는 이에 위기의식을 느껴 루머를 퍼뜨리고, 더 이상 운동을 못하게 막았지요. 또한 여성개화운동은 여성도 인간 주체로서 사회참여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됩니다. 이북의 최초 여성교인 '전삼덕'은 "나는 예수를 만난 이후로 자주적 인간이 되었다."는 말을 해요. 

  한글성경번역은 한글의 역사를 새롭게 만든 사건입니다. 한글을 살린 건 교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에요. 성경이 한글로 쓰여져서 널리 보급되었으니, 국어학자 입장에선 그 혹독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한글을 보존해준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자들은 의무적으로 한글을 깨우쳐야 했어요. 한글을 알아야, 성경을 읽으니까요. 세례 받기 위해 교인들은 열심히 한글을 배웁니다. 

  YMCA는 1903년 만들어집니다. 양반들이 교회 가기 부담스러워하니까, 양반들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이승만, 이상제 등이 다녔지요. YMCA에선 개화운동뿐 아니라 독립운동도 모색되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교회처럼 치외법권지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를 통해 서구의 음악이나 문화 등이 많이 유입됩니다.

  1920년대 농촌계몽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80% 이상이 농민이었죠. 농촌을 살리는 건, 곧 대한민국을 살리는 것이었어요. 


5. 일제, 그 힘의 논리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인들은 '조합교회'에 다닙니다.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교회였어요. 1918년, 3.1운동 직전까지 조합교회는 성장해요. 전국적으로 1만 4천 명 가량의 신자가 있었으니까요. 3.1운동 이후 조합교회는 문을 닫습니다. 조선인들은 물론 얼씬도 않으려 했고, 교세가 약화되어 자연스레 벌어진 현상이지요. 

  조선통감부의 조선통치정책, 그중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크게 3가지 정도였습니다. 첫째, 친일화를 유도하는 거지요. 교회가 정치경제 등 일제의 침략정책에 대한 대외적인 발언을 묵인하는 대신, 일제는 교회의 종교행위를 용인해주는 식입니다. 특히 교회에 면세특권을 줬어요. 당시 선교사 명의로 논, 밭, 건물 등이 있으면 세금면제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일부로 뒷돈을 주고 선교사들에게 명의를 도용해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둘째, 일제는 교회안의 독립세력을 교회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셋째, 조합교회를 한반도에 침투시켰지요. 선교사들은 언제 적이 될지 모르니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18개 단체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해요. 교회는 '독립선언'이 아니라 한층 낮은 자세로 '독립청원'을 발표합니다. 교회의 주류세력은 굳이 선언을 발표하기 부담스러워했던 겁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1901년 9월 20일.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회 비정치화를 발표해요. 교회의 정치참여를 반대합니다. 일반 개개인들의 정치활동은 교회가 간섭하거나 제한할 수 없으나, 교회가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건 반대하지요. 향린교회의 국가보안법 반대 외에, 많은 교회의 경우 비정치화 선언을 하며 교회들이 정치세력과 야합합니다. 


6. 선교사들의 어두운 그늘

  당시 선교사들의 이중적 위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선교사들은 미국인이니 당연히 미국 국무부 외교정책의 영향을 받았겠죠. 이토 히로부미와 선교사들은 꿍짝이 잘 맞았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사이가 좋았으니까요. 어쩌면 선교사들은 이런 항변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조선독립을 이루려 이 땅에 온 게 아니다. 선교하러 왔다!" 우선순위의 문제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 조금만 생각해볼까요? 선교사들의 목회대상은 누구였습니까? 조선인들 아니었나요. 일제의 탄압에 울부짖는 자들에 대한 목회적 책임이 선교사들에게 우선 있는 거 아닙니까. 선교사들이 사람에 대한 관심이 조금만 있다면, 그들이 처해있는 정황에 결코 둔감할수 없겠지요. 

  왜, 당시 선교사들을 향한 비판이 고조되었을까요? 해서는 안 될 일들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선교를 빌미로 이런저런 이권을 많이 챙기는데, 선교라는 이유로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해요. 예를들어 알렌은 광산채굴권을 팔았고, 철도부설권을 받았어요. 조선인을 하와이로 이민 보내, 반노예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백만장자 선교사 언더우드는 형이 타자기를 발명해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 돈으로 조선땅에서 석탄과 석유, 가전제품 등을 수입해서 팔아먹었지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여관이나 과수원을 운용하고, 사업을 많이 벌였어요.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선교사들을 보기엔 선교와 봉사라는 거룩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궁궐에 사는 듯한 귀족으로 보였던 겁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수 밖에요. 

  1925년, 허쉬모어 사건이 터집니다. 숨겨졌던 사건이 신문에 폭로된 것이죠. 병원 운영하던 선교사 허쉬모어는 과수원을 운영하는데, 자꾸만 과일이 사라지는 겁니다. 알고보니 아이들이 장난삼아 과일서리를 했던 것이죠. 선교사는 아이를 붙잡아, 얼굴에다가 염산으로 '도적'이라 썼습니다. 이 사건이 있을 당시엔 선교사들의 파워가 막강해서 아이도, 부모도 아무에게 무어라 말도 못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안으로만 삮였습니다. 그러다 몇 해가 지나, 신문이 '도적'이 얼굴에 새겨진 아이의 사진과 함께 허쉬모어사건을 폭로합니다. 선교사들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치밀어올랐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