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것은 고되다. 글 읽는 누군가를 고려해야 하지만 그 누군가를 고려하는 것에 쏠려(누군가에게 포장된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 내 중심(나를 돌아보는 것)을 잃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은 부족한 나를 드러내고 거기서 다시 살아갈 ‘함께 사는 기적’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Q.‘신앙이 자신이 믿는 바를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수사님을 볼 때면 그런 일상의 긴장을 자신을 비우는 유머로 풀어낸다고 생각했는데요. 저의 유머는 자기를 집중하는 것에 쏠려 있습니다. 어떻게 수사님의 그런 유머의 기술을 배울 수 있을까요?’
간절한 질문은 아니었다. 한겨레 기사에서 수사님이 ‘1980년대가 억압과 긴장의 시대였다.(중략) 떼제가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아서 좋다.’고 이야기한 것과 제가 봐왔던 수사님의 유머를 결합시켜 혹시나 질문과 대답만이 반복되면서 분위기가 아래로 내려갔을 때, 이 질문을 통해 새로운 활기를 넣어주고픈 마음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유머스럽게 던진 질문에 유머스럽게 답해주셨지만, 질문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한지 드러내준다. 이는 내가 자신의 허상에 매여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유머를 할 때도 위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재미없는 유머를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미 예상하고 소심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평가하는 보이지 않는 강한 힘에 매여 산다. 이 트랙 위에서 부끄러움과 부러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증명하려 한다. 이 부끄러움과 부러움을 먹고 이 트랙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 트랙 위에서 나는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를 상대화시키고 트랙 밖으로 나오는 웃음, 그것은 내 허상이 깨어져도 괜찮은 함께 사는 삶(공동체)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하셨다. 그것은 내 존재의 토대가 내 허상에 토대한 것이 아니고 함께 사는 삶(공동체)에 토대한 것이기에 내 허상이 깨어져도 불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함께 사는 삶에서 내 욕망은 성령의 목소리를 잠재우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된 몸된 지체가 내 고백을 확인시켜주는 소리는 나를 다시 일깨워준다.
함께 사는 삶이란 누구나 함께 살기에 모두에게 공통된 문제이자 현실이지만 기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기적은 마술과 다르게 인식(보는)하는 사람에게만 기적일 수 있다. 목표는 넘치는 삶의 충만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간혹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그걸 용서 받으면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용서받은 사람의 사랑으로 어제보다 조금 더 사랑하고픈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기적이다.(사랑이란 성장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수 있다.)
수사님은 떼제의 무엇이 중요하기보다는 떼제의 정신인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경계를 넓히는 초대(환대)의 어울림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한 수사님은 연애와 수도하는 삶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자신과 다른 이에게 과도한 기대를 내려놓고 자발적인 조그만 환대가 모여 어울림은 돈독(敦篤)해진다고 했다.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에는 관계를 통해 외로움을 보상받고픈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자라나지 않으면 사랑은 사랑이 아니게 된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I love you more than yesterday.') 자라나지 않는 게으름에서 남는 것은 관계의 집착임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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