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운동이 인권 문제와 민주화 운동의 한계 극복 요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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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장로, 해방 후 한국 교회사 7강 |
▲ 이만열 장로는 본인이 경험하고 살아온 기독교 통일 운동의 역사 이야기를 힘주어 말하며 증언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이만열 장로는 1990년부터 약 10년 동안 기독교 통일 운동의 현장을 누비며 작성했던 글들을 모아 2001년에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을 펴낸 바 있다. 책에서 "통일(운동)이야말로 인권 문제와 민주화 운동의 한계를 극복케 하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보며 '신앙과 역사 그리고 민족'이라는 세 요소를 중심으로 민족 통일 운동사를 서술했다. 또한 이 장로의 이력과 연구 활동을 들여다보면 가히 기독교 통일 운동사의 산 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라 할 만하다. 이러한 그가 '해방 후 한국 교회사 특강' 일곱 번째 강의에서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며 연구하고 경험했던 통일 운동 이야기를 요목조목 풀어냈다.
일제부터 시작된 사회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
지난 2월 16일, 푸른역사 강의실에서 이 장로는 여느 때와 같이 수강생들에게 인사를 정중히 한 후 "통일 운동에 관련해서는 단순히 국토 분단만의 문제가 아니고, 사상적 배경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말씀드리겠다"고 말하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초라고 할 수 있는데, "'북쪽'에서 역사 연구하는 사람들은 삼일운동도 러시아에서 일어난 1917년 10월 혁명의 여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정리한다. 하지만 "역사학에서 논증을 하려면 자료가 나와야 된다"며 "'남쪽'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무장 혁명 관련된 자료가 연변에서는 자료들이 많이 나오지만, 국내에서 나온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주의 혁명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남쪽 학자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먼저 이 장로는 일제강점기의 민족 운동부터 다루었다. "민족 말살 정책으로 국내에서 민족운동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며, "당시 수감자들은 사회주의 계열과 기독교도들의 두 부류였는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사상범이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두 부류는 각각 "주의·주장과 신앙하는 바는 달라도 감옥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갈라지기 시작했고, 북한에서는 더 심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오면서 기독교 세력을 약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한 흐름이 있었던 것. 이는 "처음부터 기독교가 타깃은 아니었고, 자본가와 지주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어서 이 장로는 "공산주의를 직접 경험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화해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통탄해했다. 한편 "이념적 집단으로서 기독교가 분단 세력에 좋은 역할을 했다"고 말하며, "분단은 세계 강대국의 냉전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고착화되면서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6·25 이전에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반공이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고, 6·25때 휴전을 주장해도 기독 진영에서 많이 반대했다"고 덧붙였다.
강의안 안 보며 살아 있는 통일 운동의 역사 증언해
이 장로는 여느 강의 때와는 달리 첫 20여 분간 강의안을 보지 않은 채 수강생들을 쳐다보기만 하면서 말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장로의 사상과 활동 경력이 이번 강의 주제에 충분히 체화되어 있음을 반증한 것이다. 이 장로는 잠시 강의안을 몇 장 넘겨보더니 리모컨을 아예 내려놓고 "(이제부터는) 강의안을 보지 않고 계속 하겠다. 강의안보다 (말로 듣는 것이) 이해가 잘될 것이다"며 굵직하고 장구한 역사를 막힘없이 내뿜으며 기염을 토했다.
다시 통일 운동의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았다. "6·25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된 이후 교회는 기도회나 성명서 또는 대중 운동의 형태로 민족 통일에 대해 관심과 입장을 꾸준히 표명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를 통제한 정치적 상황과 민족 분단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 때문에 교회는 1950년대만 해도 반공적 입장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의견이나 주장을 갖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부터 남한 사회에서 자유와 사회 정의를 구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하자는 주장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었는데, 통일을 위한 기독교인의 과제는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동시에 우익 독재나 독점자본주의와도 대결"하는 것이었다. 이 장로는 "이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화할 수 없으므로 북진 통일을 하든지 무력으로 남한 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전투적 대결 논리에서 벗어난 시각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비판의 화살이 남한 사회도 겨냥했다는 점에서 통일 논의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남북한 최초의 7·4공동성명을 다루었는데, 이 장로는 "중요한 것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원리"였고, "그동안에 진행된 진보적 기독교인 개인 차원에서 전개된 통일 논의를 넘어서 민중의 전반적인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이 시기 통일 논의를 한 걸음 진보시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변혁과 통일의 성취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과 민중이 통일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1980년대에 교회의 통일 운동이 맺은 귀중한 열매임이 분명했다.
안보 논리에 맞서 통일 운동 태동
그 후 한국교회가 민주화, 인권 운동에 힘쓰던 시기에, 유신 정권은 국가 안보 논리를 내세웠다. 두 운동의 과제를 보류시키면서까지 '안보'를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옹립했던 것이다. 나아가 군사 정부는 안보 걱정만 없으면 서구처럼 (사상의 자유를) 무제한 허락할 수 있지만,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김일성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당시에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민주화, 인권 운동에도 한계가 있었는데, 이 장로에 따르면 "기독교 운동가들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논리 개발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통일 운동과 연관되었다."
당시 안보 논리에서 핵심이 되는 사항이 북한의 김일성 문제였다. 이 장로는 "그 상황이 왜 생겼냐고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바로 분단 때문에 안보 문제가 발생했고, 그래서 분단 상황을 해소시키는 것이 통일"이라고 지적하면서, 분단을 해소시켜서 인권 및 민주화 운동을 진척시켜야 했던 시대적 과제를 설명했다.
이어서 이 장로는 "기독교 진영에서는 70년대 후반부터 그런 논리가 많이 나왔으나 점화되지 않다가 80년 광주를 계기로 많이 나왔다"고 분석했다. 또한 "독일 에카데(개신교협의회)와 미국 NCC에서 한국의 분단 상황에 관심을 표명하고 국제적인 지원을 통해 NCCK 통일위원회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안기부에서 위원회의 모임 자체를 방해했기 때문에 그 기능이 발현된 것은 2~3년 후였다"고 덧붙였다.
공안 당국의 압박과 감시가 계속 되어도, 통일에 대한 교단적 차원의 신앙고백이 출현했다. 이 장로는 "80년 기장, 84년 통합에 이어 85년에 한반도 평화 통일 선언이 (드디어) 나왔다"고 말했다. 또한 "84년 일본에서 열린 '토잔소 회의'가 한국교회 통일 운동에 결정적 영향 미쳤다"고 소개하며, 여기서 "한반도의 통일은 남북한 기독교의 책임이라는 결의를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서 "교회의 통일 운동에 나름대로 이론적 틀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국제협의회에서 정해 주니까, 교회가 통일 운동을 할 수 있는 비빌 언덕이 되었다"는 평가를 덧붙였다.
88선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 보았다
그러다가 90년 스위스에서 열린 글리온 회의에서 남북한 교회가 성만찬을 같이 했는데, 이 장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임을 천명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2년 전 88년 2월 29일에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교회 선언(이후 '88선언')'이 나오는데, 이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남북 정부에서 각기 통일 방안을 많이 이야기했지만, 88선언만큼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그 선언을 "(여러 번) 정독하고 너무 감동받았다"고 밝히고, 88선언에 대한 교회사적, 신학적 평가를 면밀하게 했다.
88선언의 앞부분에 죄책 고백이 먼저 나옴으로써 "선언이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고 평가했고, 통일 원리를 새롭게 제시한 점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했다. 또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에 민주주의적 민중들의 참여와 인도주의적 방식을 덧붙였다"고 말했다. 이전의 통일 논의는 정부에 속한 몇 사람이 모여서 발표한 것일 뿐, 통일을 누려야 할 민중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수강생들은 통일 운동의 역사와 의미를 배우며 시대적인 사명을 확인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
한편 이 장로는 88선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되었다"고 밝혔다. 당시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이 없었는데, 그런 반대를 통해서라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 "통일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던 보수 교인들도 '왜 저렇게 떠들까'는 호기심으로 (88선언을) 읽기 시작한 결과, 통일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통일 의식이 성장해서 결국 "90년대 북한 돕기 운동에 보수 교회도 나서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통일 운동으로 진보와 보수가 다시 손잡아
이어서 북한 돕기 운동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설명했다. 북한은 국내 생산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남한의 원조와 동구권의 지원을 못 받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92년에 NCCK 총무 권호경 목사가 김일성을 만난 후 기독교가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진보 교단은 원래부터 관심 갖고 있었는데, 권 목사는 '열린' 복음주의권 사람들과 접촉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당시 진보적인 사람들은 관심이 있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나 돈은 많지 않았는데, 복음주의권은 관심이 없고 방법도 모르지만 돈은 댈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진보와 보수가 만나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 문제로 진보는 개헌 반대, 보수는 개헌 찬성으로 확연히 갈라졌다"고 거슬러 분석하면서, "93년에 이르러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진보와 보수가 손을 잡았다"고 평가했다. 이를 "국내 정치 문제로 나뉘어졌다가,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민족 문제로 손을 잡게 되었다"고 역설했는데, "것을 계기로 남북나눔운동이 만들어지면서 진보와 보수의 협력이 (아직까지도) 잘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통일 문제를 두고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며 통탄했다.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시청 앞에 모여 '반김, 반핵' 구호를 외치며 인공기를 불태우는 반면, 유연성 있는 진보 세력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모여 '평화와 화해'를 외친다"고 말하며 또 양분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러한 갈등을 화해시키고 서로가 용서하는 것이 오늘날 통일 운동에서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장로는 "통일 운동이 기독교에 의해서 하나의 민중적 운동으로 자리 잡아 가게 되었다"는 것도 강조했다. "그 이전에는 정부 당국자만 배타적으로 가능했던 상황에서 민간, 민중의 문제로 끌어내려는 역할을 한 것이 기독교 통일 운동이었다"고 역설했다. 지금은 200개가 넘는 통일 단체가 있으며, 에큐메니컬과 복음주의권에서도 한목소리로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희망도 잃지 않았다.
우리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나온 민중신학 높게 평가해
그렇게 통일 운동의 역사를 샅샅이 살펴본 후, '새로운 신학의 모색' 부분 중 '토착화 신학'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 장로는 토착화 신학에 대해 기본적으로 "기독교 복음을 우리 상황 속에서 재해석하고 새롭게 개념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풍류객 사상은 "상당히 나간 것"이라고 일축했고, 민중신학에 대해서는 "방법론상으로 좋은 게 있지만, 성서가 콘텍스트가 되는 것은 동의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안병무의 오클로스(민중) 주장은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고신파 사람으로서(민중신학을 제창했던) 기장 교단보다 더 높은 평가를 해 준다"고 운을 떼었다. 먼저 "모든 학문은 상황과 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에서 학문이 출발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에,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신학은 우리가 고민해서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해 주어진 것이 많지 않고, 대부분 서구인이 서구의 상황에서 고민하며 내놓은 것을 들여온 것"이라며 빈약한 현실을 개탄했다.
또한 "상황을 고민하는 데서 신학이 나온다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의 신학은 수입 신학일 뿐"이라며, 그것을 가지고는 우리의 교회와 사회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오지 못한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다가 "신학자들이 70년대 유신과 산업화로 인해 모든 민중들이 죽어 가는 상황을 목도하다가, 성경에서 민중을 발견하여 문제 해결을 모색하며 민중신학이 나온 것"이라고 호평했다.
한편 "(민중신학의 구체적 적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교회사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높은 가치를 두는 이유는 우리의 상황에서부터 실존적인 고민을 통해 나온 최초의 신학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민이 전혀 없다"고 아쉬워하면서, <복음과 상황>에 기고한 '한국교회, 자기 신학이 있는가'라는 252호 칼럼을 읽어 보라고 권하며 강의를 마쳤다.
강의안에는 구구절절한 사건들이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으나, 이 장로의 체화된 언어는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역사를 해석하고 서술하는 기술적인 능력보다 직접 역사의 한복판에서 경험하며 성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힘이 있음을 느꼈던 강의였다. 내용적으로도 통일에 대한 시대적 사명을 더욱더 분명하고 강렬하게 배울 수 있어서 그 기쁨이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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