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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강좌

[해방 후 한국교회사] 제5강 : 군사독재 시절에도 교회가 성장했던 이유는? (뉴스앤조이_김태훈)

군사독재 시절에도 교회가 성장했던 이유는

해방 후 한국 교회사 다섯 번째 강의는 기록적인 한파가 있던 날에 이만열 장로의 "추운 날씨에도 (생각보다) 많이 와서 격려가 된다"는 따뜻한 격려로 시작됐다. 격려를 받은 자는 이 장로뿐만이 아니었다. 수강생들도 정년퇴임 한 지 오래된 이 장로가 추운 날씨에도 늦지 않게 건강한 모습으로 강단에 서 주어서 감사한 마음이 컸다. 기독청년아카데미는 이렇게 강사나 수강생들이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의지로 뜨겁게 만나서 서로에게 격려를 주고받는 모임이다.


▲이 장로는 "추운 날씨에도 많이 와서 격려가 된다"며 다섯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이 장로는 "교회의 성장에 기도와 말씀, 즉 부흥회와 사경회의 역할이 컸다. 삼일운동 후에 기독교 개종자가 많았고, 1920년대에 길선주, 이용도 같은 부흥사들이 신유의 은사와 예수 천당 신학으로 부흥했다. 1930~40년대 초에도 부흥했다. 6·25 통해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교회 많이 찾으며 부흥했다"고 말하며 본격적인 강의를 시작했다.

흔히 알다시피 '한국 인구의 1/4이 기독교'라고 할 정도가 된 것은 6·25 후의 급속한 성장을 통해서다. 하지만 이 장로는 "실제로는 1/4(이나) 된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1985년 선교사가 들어온 지 100주년 되는 때에 기독교가 25%나 된다는 말이 나왔지만, 신뢰도에 문제가 있고 정확한 수치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또한, 1990년대에 들어 성장이 둔화했고 2000년대에 오면서는 내리막길에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한편 1960~80년대가 한국 기독교의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이 시기의 성장은 무엇보다 교회와 교인의 수가 급증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1993년도 한국종교사회연구소 통계에 의하면 1960년에 5011개였던 교회가 10년 단위로 157%, 65%, 69%가 증가하여 90년대에는 3만 5819개로 증가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1960년부터 30년 동안 한국의 교회 수가 7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 성장의 반비례적 관계

이어서 교단별(장로교, 오순절, 성결교, 침례교, 성공회) 교회의 양적 성장도 각각 소상하게 다루었는데, 장로 교단 내의 비교점이 흥미로웠다.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고신은 상대적으로 작은 교단이지만 1970년대에 교세가 배가되어 교인 수 20만 명을 넘어섰던 반면, 가장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는 다른 장로교단들만큼의 양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이것은 다른 교단들이 교세를 늘려 가던 군사독재의 시기 동안, 개인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주화, 인권, 노동운동 등으로 사회의 구조 악과 싸우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 장로는 "해방신학과도 관련될 수 있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면서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구원과 구조 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존의 선교 방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구조 악만 외치고, 개인의 영적 과제와 죄의 문제에 등한시한다는 비판받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만 공부를 하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요즘은 하나님의 선교를 "기장, 감신, 통합 일부에서만 말하고 보수 측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보수 측에서도 구조 악을 말해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하나님의 선교)에 이르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는 왜 말하지 않느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 부자 감세로 말미암은 양극화 문제를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보수 교단에서도 하나님의 선교를 이야기하는 것을 실천 과제로 여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재 시절 심리적 안정 찾기 위해 종교에 귀의해

이어서 교회의 성장 배경을 살펴보았다. 먼저 이 장로는 군사독재 시절을 회고하면서 "유신 시대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의식을 가지고 보는 사람은 유신의 잔재에 대해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경제성장을 좀 했다는 것으로 (유신 독재가) 설득되지 않는다"고 강한 어조로 힘주어 말했다.

1961년 5월에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명분으로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기초한 군사독재를 구축해 나갔다. 분단과 독재 상황이 조성한 심리적 불안감, 정치 경제적 불균형, 사회적 불만,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 등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분출하는 길을 차단당한 국민은 점점 더 욕구 불만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불만·불안·공포로부터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해서 종교에 귀의했다. 이 장로의 날카로운 평가처럼 "정치적인 불만을 신앙을 통해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종교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현세적·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며 강력한 보상적 기제로 작동하기도 했다. 적극적 사고, 성공의 복음, 풍요의 복음 등 자본주의화 된 축복의 메시지는 이 시기에 크게 번창한 교회에서 공통으로 들을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군사정권이 시작된 1961년에 서울 서대문에서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유신 체제가 본격화된 1974년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유신 독재가 진행된 10년 동안에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배 이상 교세가 증가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시기에 크게 성장한 거대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경향"이었다. 이에 대해 이 장로는 "일부 교회에서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조금 늦었다"고 일갈했다.

한편 이 장로는 '사회학자들의 재미있는 분석' 두 가지를 소개했다. 첫째는 박정희 정권의 '잘 살아 보자'는 새마을운동이 교회에서의 축복 복음과 맞물려서 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분석과 순복음교회 교인 중에 부동산 관련 업자들이 상대적으로 매우 많다는 분석이다.

기독교는 십자가 지는 것이지 자본주의 논리 따르는 것 아니다

한국교회 양적 성장의 전성기인 1970년대에 교회의 성장을 꿈꾸던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미국에서 들어온 교회 성장 이론이었다. 풀러신학교의 교회 성장학자인 도널드 맥가브란은 "한국교회는 분열 자체가 성장에 큰 효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반면 이 장로는 작년 LA 어느 교회의 집회 때 김세윤 박사가 했던 발언을 소개했다. 풀러신학교가 한국교회에 전해 준 교회 성장론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질적 성숙 없이 양적 성장에만 치우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그 문제에 관해 풀러신학교에서 여러 번 토론을 거쳐서 결국 사과를 해야 하는 문제로 정리했다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 장로는 "이것을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일축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랑의교회의 재건축 문제도 신랄하게 다루었는데, "사랑의교회 교인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며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교회 성장론의 구체적 내용이 "자본주의 논리 그대로다. 금권주의를 그대로 도입한 것"이라는 비판은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대형 교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성공의 신학에 대해서 "기독교가 그런 겁니까? 십자가를 지라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비판했다.

실제로 교회 성장을 위한 이론들은 목표를 설정하고, 평신도 교육을 강화하고, 교회의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장려하여 결과적으로 전도와 선교에 큰 자극이 되었으나, 교회 성장주의는 교회 성장을 상업적 방식으로 접근하여 물량주의와 경쟁을 조장하고 외형적 성공을 이상화시키며, 무엇보다 십자가의 정신을 망각시키는 부분이 있다. 이 장로는 그러한 교회 성장론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로 순복음의 조용기 목사와 감리교의 김선도 목사를 실례로 들었다. 그들 외에도 많은 교역자나 부흥사들이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도들에게 자기 일에 대한 열의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자 했다. 이처럼 다소 좋게만 볼 수 없는 성장사의 뒷이야기를 "한국교회 성장에는 이런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당시의 교회는 성공의 신학을 양산할 뿐만 아니라 교회 성장에 효율적인 새로운 신학과 방법을 도입하고, 경쟁적이고 적극적인 부흥 운동과 교세 확장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교회의 전통적인 테두리를 벗어난 '파라처치(para church)' 운동이 직장과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초교파 운동과 함께 교단별 교세 학장 운동도 본격화되었다. 이때 교단마다 성장 목표를 세웠는데, 이 장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목사 안수도 이용되었다"고 말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수를 받으려면 단독 목회를 몇 년 이상해야 한다는 제도가 생긴 것이다. 이는 기존 교회에서 부교역자를 하지 말고,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라는 취지였다. 이 장로는 "(그러면서) 전도와 선교 윤리가 무너지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안수를 받기 위해 사생결단을 하고 (단독 목회의 소명이 없어도) 단독 목회를 해야 했고, 그 덕분에 교단은 교회의 숫자가 늘었던 것이다.


▲이번 강의는 수강생들이 속해 있는 교회와 활동했던 선교 단체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더 집중할 수 있었
   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대규모 부흥 전도 집회의 양면성

이어서 대규모 부흥 전도 집회에 대한 양면성을 다루었다. 유신 체제가 가동되던 암울한 시기에 연이어 개최된 1970년대의 대규모 부흥 전도 집회는 사람들의 정치 사회적 불만을 해소시키는 역할도 감당했다. 하지만 이 장로는 "이런 집회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집단적 황홀과 도취감 속에서 과연 신음하는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역사의 방향을 뚜렷이 볼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강의안을 힘주어 말했다. 이 시기에 개최된 크고 작은 부흥회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암울한 현실을 잊고 초월적인 세계로부터 위안을 받게 해 주었지만, 물질적, 육체적 축복을 신앙과 연계시키는 통로였음을 지적했다.

한편 4일간 650~1700만 명이 여의도에 운집한 엑스플로 74, 77년 대회를 소개하면서 "유신 시대에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것은 결국 정권과 결탁한 모임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이 불가능한 집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정권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대규모 집회를 무슨 까닭으로 허용한 것일까?

이에 대한 이 장로의 분석은 종교 자유 비판을 무마하기 위함이다. 당시 진보적 기독교는 인권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 나갔기 때문에 억압을 많이 받았다. 그런 진보적 기독교와 연대하고 있는 외국 단체들은 "한국에는 종교 자유가 없다"는 비판과 성명 활동을 많이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권은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대형 집회를 통해 보이려 했던 것이라는 분석이다.

학원 선교 단체의 반성

학원 선교 단체들도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혼란을 겪고 있던 수많은 학생을 개종시켰으며, 체계적인 신앙 훈련을 통해 많은 교역자, 평신도 지도자, 그리고 선교사들을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 단체들은 예외 없이 매우 보수적인 신학을 가졌으며, 개인 구원과 좁은 의미의 선교 및 경건에 집착하여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 또한, 이 단체들은 학원에 난립하여 경쟁적으로 활동하면서, 선교와 복음 전파라는 이름 아래 양적인 팽창을 추구하여 자기들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기존의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대목에서 이 장로가 활동했던 '국산' 선교 단체 SFC와 서울중앙교회 대학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FC에서 좋은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지금도 각계각층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 평가했고, 서울중앙교회 대학부 시절 네비게이토, UBF 등의 단체 활동만 하면서 교회에는 안 왔던 사람들이 교단 신학교의 교수가 된 사례를 들면서, "그 사람들의 교회관이 제대로 정립된 사람일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들 중 일부는 대학 시절에 기존 교회에 대해 아주 냉소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보수적인 교회와 단체들을 행동에 나서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선거를 맞이하여 기독교문화연구회 주도로 공정 선거 감시와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한 복음주의청년학생협의회가 결성되어 군사독재를 종식하자는 사회의 열망에 동참했다. 진보적 학생 단체는 이전보다 활기찬 활동을 보이지 못했는데, 그 까닭으로 이 장로는 "그전에 힘을 너무 빼서 소진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이러한 정황에서 당시의 보수 단체 가운데서 조금 진보적인 단체들이 나왔던 것이다.

이어서 이 장로가 관여한 단체들을 소개했다. '기독교문화연구회'는 실천적으로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선구적인 단체'였고, 그 단체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했던 <대학기독신문>은 '진보적 복음주의 학생들의 전위'로 활약했다. 이 장로는 <대학기독신문>에 "참 좋은 글이 많다"고 극찬했고, 기고를 많이 했던 김회권, 이문식, 박철수 목사의 이름을 거론하며 '뛰어난 이론가들'이라고 평했다. 특히 김회권 교수의 글이 좋았으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자세한 회고가 복음과 상황(2월호)에 실렸으니, "꼭 한번 읽어 보라"고 추천했다. 한편 이 장로는 거의 매시간 수강생들에게 "글을 잘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복음성가와 찬양 집회의 발달 대목에서 이 장로는 "이쯤 되면 감 잡을 수 있죠?"라는 말로 주위를 환기한 후, "나중에 교회사를 쓰면 긍정적으로만 쓰지 않을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복음성가와 찬양 집회의 발달이 명상과 기도를 다 빼앗아 버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조용히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열심히 노래 부르고 찬양 부르는 것만큼 단둘이 하나님과 만나느냐"는 의구심을 표출했다. 그들이 단독적으로 하나님 만나느냐에 대해서는 자신 없다는 견해다. 한편 "틀렸으면 틀렸다고 질문해라. 그래야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며 다른 입장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였다. 또한 "부흥회 노래는 우리(이 장로 연배의 사람들)가 쉽게 따라 부를 수 없다"면서 웃으면서 혀를 찼다. "엇박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것도 "교회 성장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국외 선교의 양면성도 다뤄

마지막으로 국외 선교에 대해서 다루었다. 국외 선교도 역시 교회 성장과 마찬가지로 양면이 존재했다. 본격적인 국외 선교 운동의 시작은 우리나라가 경제성장과 함께 국외로 진출하는 것과도 관련 깊다. 긍정적인 평가는 강의안에 적혀 있는 것으로 대신했고, 이 장로는 문제점들을 주로 다루었다.

먼저 경쟁적 선교사 파송의 문제점. 이 장로가 직접 가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선교 현장에는 "경쟁이 너무 심했다"고 말했다. 교인 수나 예산 규모와 선교사의 파견 수가 교회의 규모를 나타내는 척도처럼 되면서, 각 교회는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파견된 선교사를 일부 지원하는 것으로 선교사 지원 건수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렇게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훈련받지 못하거나 사명감이 부족한 사람이 파견되기도 하고, 교단이나 선교 기관과 협조하지 않고 각 교회가 임의대로 파견하는 일도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저개발 지역에 파견된 선교사들 가운데는 현지 문화나 전통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현지인에게 적합한 교회를 건설하기보다는 한국식 교회를 이식시키려 하며,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 있는 자의 오만함을 보이는 등 과거 서구 선교사들이 보였던 제국주의적 태도를 답습하는 때도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자기 교회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교회들, 잘사는 걸 보여야만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여 선교사 집에 서번트 7~8명이나 두면서 선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국외의 선교 기관 지부를 다루면서 이 장로가 직접 관여해 온 <희년 선교회>의 활동상도 소개했다. 1993년부터 한국에 와 있는 국외 노동자를 돕기 위한 한국민간교류협회에 등록된 단체다. 사단법인이라서 단체를 통해 국외에 나가는 선교사들도 있는데, 이 장로는 "국외에 나가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국내에서 외국인 선교하는 사람들에게도 선교사 타이틀을 주라"고 요구해 오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에 나가 보면 좋겠다. 그러면 선교 영역을 많이 넓힐 수가 있다. (우리가 그곳의) 가난을 도와주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고 독려했다. "우리가 130~140년 전에 미국으로부터 많이 받았던 것처럼, 우리가 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어서 "2000년대에 들어 1만 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파송한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 가는 선교사 수를 보유하고 있다. 선교는 예수의 최후 지상 명령이다. 이 가운데서도 선교사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며 강의를 마쳤다.

이 장로와 다른 의견의 질문 쏟아져

강의 이후 이어진 질문 시간에 박00 목사는 두 가지 질문을 했다. 먼저 통합과 합동 측의 차이에 대한 원인을 물었다. "통합은 재산권이 중앙에 묶이기 때문에 분열이 적은 것이라고 목회자들이 보는 관점이 있다. 통합이 안 갈라진 것은 특별한 사례"라며 그렇게 보는 것이 맞냐고 물었다. 이에 이 장로는 "교단에 따라 재산권은 중앙에서 장악한다. 특수 목적을 가진 법인을 만들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통합 측은 폭이 넓다는 것. 극진보에서 극보수까지 다 포용한다. 신학적 갈등이 없지만, 교회 자체는 깨지기도 한다"고 답했다.

두 번째 질문은 국외 선교사들이 집에서 헬퍼를 쓰는 것에 대해 다른 관점을 밝힌 것이었다. "현지인 한 사람을 씀으로써 가족들 여러 명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현실 문제의 해결 측면과 일을 맡기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측면을 보면, 이해되고 효과적인 방법 아닐까"라고 물었다. 이 장로는 역시 일면 수긍하면서도 "한두 사람 쓰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 아니다. 언어 배우고, 가사를 일일이 못 하니까 맡길 필요는 있다.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더라도 4~5명(이나) 쓰는 것은 이해 안 된다는 뜻이다"고 답하면서, "얼마든지 공적으로는 쓸 수 있다. 자기 집에 종으로 부리지 않고. 동역자로는 몇십 명 써도 된다. 집에 하우스 매니저를 두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 수강생으로서 지역 교회의 한 목사가 이 장로의 의견과는 다른 입장을 밝히며 질문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조00 목사의 질문도 이어졌다. 이 장로가 앞서 밝혔던 경배와 찬양에 대한 불신에 대한 반론이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만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세대에 따른 문화적 차이 아닌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 만나는 부분도 있다고 본다." 이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세대 차이를 전제한다. 그렇더라도 좀 그렇지 않나. 드럼 쳐 가면서 하는 건…좀 난…" 하며 뒷말을 흐렸다. 말을 아꼈지만, 수강생들은 다 이해하는 눈치였다. 이어 "개신교인들도 요즘 템플 스테이, 피정 등 타 종교의 생활 체험에 많이 다닌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 이유가 바로 조용히 하나님 만나는 기회가 적기 때문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하나님 만난다고 한다면 좋은 일이다.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귀담아듣지 마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가향교회에 다니는 청년이 "지난 시간에 한국교회가 정권과 야합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군사독재 시절에는 없었나"라고 묻자, 이 장로는 "박정희와는 처음에 갈등 관계였다"고 답했다. 불의한 정권에 예언자적인 역할을 했던 것일까? 아쉽지만 아니었다. 교회가 박정희 정권 초기에 갈등 관계였던 이유는, 박정희가 불교를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이 장로는 정교 분리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당시나 지금이나) 보수 교회는 불필요한 정교 분리론을 강조하면서, 필요한 간섭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교분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일수록 정권에 손뼉 쳐야 할 때에는 그렇게(분리해서) 행동 안 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축복해 주는 것은 정교분리라고 생각 안 했다"며 정권에 비판하는 것만 정교분리라고 생각했던 이들을 꾸짖으며, "그런 사람들일수록 조찬기도회에 자기를 안 불러줬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 장로는 이처럼 "엄격하게 정교분리를 주장하려면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불의에 비판을 못 했으면 협조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계속 내놓았다. "대형 집회를 연 것도 일종의 (정권과의) 야합"이라며, 유신 시대에 진보적인 교회에 경찰관들이 와서 설교를 감시하면서 반정부적 발언을 하면 즉시 연행하기도 했던 사례를 들었다. 한편 "보수적 교회에서는 (정권의 불의에 대해) 무감각할 뿐 아니라 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도 많이 했다"면서, "드러난 야합만이 아니라 (은밀히) 숨겨진 야합도 상당히 많았다"고 답변했다. "지금도 극보수는 정권에 대해 무조건 찬성한다. 대북 정책에 대해 사랑과 화해를 이야기하면, 종북이라며 때려잡으려 하는 것도 정권과 야합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이 장로가 어느 강연에서 북한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한 적이 있는데도, 한 청중에게 '좌빨' 등의 온갖 욕을 다 받았던 이야기를 길게 소개했다.

전체 8주 강의 중에 중반을 지나 후반부로 가면서 다루게 되는 내용이 우리의 지형과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면서 내용이 더 살갑게 다가오는 듯하다. 교회 교단과 선교 단체들의 역사는 우리 대부분이 발 딛고 서 있는 토양의 자양분이 어떠했음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신선하기도 하고 부패하고 떳떳하지 못한 모습에 더욱 가슴 시리기도 했다. 이처럼 아직도 영향 끼치고 있는 여러 역사적 문제들이 많고 극복해야 할 과제가 선명하게 산적해 있다. 앞으로 남은 강의도 기대가 많이 되고, 이런 시점에 더욱 서로의 질문과 고민을 열심히 나누어야 할 까닭이다. 서로의 격려를 확인했던 다섯 번째 강의는 봄이 온다는 입춘 이틀 전날이었다. 시나브로 찾아오고 있는 봄의 기운을 통해서도 많은 격려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