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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강좌

[현장스케치] "해방 후 한국교회사" - 5번째(2012.2.2) 시간 (이용준님 글)


새해를 시작하며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는 시간이 참 은총의 시간입니다. 벌써 중반을 지나면서 5번째 시간을 공부했습니다. 2012년 1달의 시간을 보냈지만 교회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꽤 오랜 시간을 산 것 같습니다.^^ 엄동설한을 마다 않고 역사 공부 마당에 청년들이 함께 했습니다.



이 번 시간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대해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공부했습니다.

기독교의 양적 성장에 대한 산술적 통계와 더불어 그런 수치들이 가지고 있는 이유와 정황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웠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한국 기독교가 유례없는 양적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는 말씀으로 강의가 시작 되었습니다. 다양한 통계 자료들을 보여 주셨는데 자료들이 신뢰도의 문제가 있고 수치가 서로 일치하지 않지만, 다양한 교인 수 통계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에 걸쳐 한국 기독교의 교인 수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 주었습니다. 1950년에 3,114개였던 교회의 수가 1990년에는 35,819개로 30년 사이에 7배나 증가 하였습니다. 오순절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거의 모든 교단과 교파들이 양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 중 기독교장로회가 돋보였는데, 다른 교단들이 교세를 늘려가던 군사독재의 시기 동안, 기장은 개인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노동운동 등을 통해 사회의 구조악과 사우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 부분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어떤 것이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색체가 짙은 교단에서는 개인 영혼, 죄 문제 들 비판을 하지만 최근에는 거의 하나님의 선교가 정도가 다르지만 보수 진영에서도 흡수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1960-80년대 교회 성장의 사회적 배경은 군사독재와 억압, 경제 성장 제일주의와 극심한 빈 부차,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개인 정체성의 혼란을 꼽아 주셨는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느낀 사람들에게 종교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좋은 장이 되었고 집단보다는 개인구원을 강조하며 근대적 개인주의와 잘 어울렸던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에서도 전통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불교와 유교, 무교보다 도시인들에게 더 좋은 안식처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분석이 있었습니다. 여러 교단 중 침례교는 1957년부터 농촌지향적인 ‘직접전도사업(Direct Evangelism)'을 시도하였는데 목표는 옳았으나 점점 산업화, 도시화가 가속되는 상황에서 전도사업 성공을 이루기 어려워 1970년대 이후 미국의 남침례회 해외선교부와 공동으로 도시중심의 전도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한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향으로 기복 신앙(사회 혼란과 기복신앙 성장 관계 사례 : 순복음교회)의 발전도 꼽아 주셨습니다. 72년 유신체재와 80년부터의 신군부 상황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81년 순복음교회는 20만 명 이상 교세가 확장되었고, 이 시기에 크게 성장한 거대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적인 특징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 표현 중 기복 신앙이 새마을 운동으로 포장 되어 새마을 운동과 기복 신앙이 쌍두마차가 되었다는 표현이 정치, 경제적으로 어두웠던 시대 속에서 거대 교회들의 탄생속에서 기복 신앙의 흡입력을 실감케 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부흥 운동, 대규모 전도 집회가 일어났는데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암울한 시기에 연이어 일어난 대규모 집회는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불만을 해소키는 역할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4일간 1700만 명이 여의도에 운집한 집회가 있었는데, 표현, 집회 자유가 탄압되었던 시대 상황 속에서 하루에 적어도 400만 명 이상이 모일 수 있을까? 교회와 정치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 되었을까? 인권, 민주주의 탄압의 시기에 대규모 집회는 국제적으로 한국의 어두운 정치 상황을 가려 줄 수 있는 방패가 되었던 것 같았고, 교회 역시 정치적 보호 하에서 급팽창을 하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들었습니다. 대규모 집회는 또한 신도들의 초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도 물질적 육체적 축복을 신앙과 연계시키는 통로적 역할을 감당했고 부흥회,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기도원(성령 체험의 장소이자 개인 문제의 해결 장소)은 1970년대 들어 일탈적 현상을 모여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회 성장 이론의 한국에 무분별한 유입 또한 지켜 볼만한 장면이었습니다. 지난 시간부터 계속 이야기 하셨던 도널드 맥가브란(“한국 교회의 분열이 교회 성장을 주었다“)과 피터 와그너, 슐러(불가능은 없다.) 등의 교회 성장 이론들이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향에 대한 분석은 교회의 이론 체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습니다. 한 예로 함께 복음과 상황을 시작했던 김진홍 목사의 묵상 글도 지금도 받아 보고 계신데 그 글도 미국의 교회 성장이론가 들의 메세지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한 때 인기 있었던 긍정의 힘이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장로님은 성경적 가치 안에서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과 십자가가 빠진 성공 신학을 일갈하기도 하셨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오렌지카운티의 수정교회가 파산되어 경매되었다는 이야기를 교회 성장론에 입각한 교세들의 최근 추세를 예로 들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파라처치와 연계도 교회 성장 원인 중에 하나를 들어 주셨습니다. 학원 선교 단체들이 보수적이면서, 개인 구원의 관점에 빠져 사회 제반 문제에 무지한 신앙에 대한 비판도 들어 주시면서 학원 복음화 협회의 설립 취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파라 처치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유학을 다녀오고 교회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일부 사람들의 “교회관“이 올바른 교회관을 가졌느냐?라는 질문은 제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질문 이었습니다.

해외선교는 교회 성장과 함게 더불어 급격한 증가를 이루었는데, 80년대 민주화의 일환으로 해외 여행의 자유화와 인적, 물적 성장은 해외 선교 활성화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원 성교 단체들과 전문 선교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산술적으로 세계 2위 파송국이 되었다는 점과 경쟁적 선교, 선교사 훈련 부족, 교단이나 단체와 협조 없는 교회 임의 파송, 상호 협조 없는 비효율적인 선교, 현지 문화를 존중하지 않고 한국식 교회를 이식하는 경우 등 과 같은 문제들도 나눠 주셨습니다. 선교사의 자기 관리와 철저한 보고의 필요성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역시 교수님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오는 역사의 산 경험이 녹아 있는 세세하고 재밌는 구수한 이야기와 청년과 같은 눈빛으로 일침을 가하는 질문은 어느새 피곤을 단 방에 날려 버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 만 그런 건 아니죠? 남은 시간도 진중하고 즐거운 시간 만들며 만나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