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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강좌

바울과 현대철학 강좌 후기 (천다연 님)



안녕하세요. 지난 목요일에 수강생이자 교육간사로 인사드렸던 다연이에요 :-)

주말 동안 지난주 강의를 갈무리하면서 첫날 강의 후기를 남겨봅니다.



지난 목요일은 강의 첫날인만큼, 둘러앉은 수강생들이

강의를 수강하게 된 계기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먼저 있었습니다.

수강생중에는 인류학을 공부하는 분, 문예창작을 공부했던 분도 계셨고요.

세월호사건 이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객관화하고 싶었던 분,

이런 상황을 감정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분,

잡지 빅이슈 편집국에서 일하면서 야심찬 철학 코너를 기획하고 계시는 분,

자칭 마로니에 키즈라고 칭하는, 문화예술관련 일을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또, 어떤 생각으로 일상을 살아야 할까, 근원적 고민을 갖고 오신 분,

일상의 스트레스와 고통이 자리한 삶과 밀접한 철학을 맛보고 싶어 찾아오신 분,

바울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하고 싶었던 고등학교에서 일하시는 분,

예수에 대한 관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바울과 현대철학'이라는 강의제목에 찬사를 보내셨던 분도 계셨지요.ㅎ

어깨너머로 들어온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강의를 통해서 새롭게 하고 싶으셨던 분,

철학은 아주 문외한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바울의 이미지를 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궁금함을 갖고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다들 강의를 듣는 이유가 뚜렷했지요.

자기소개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의 수위로 강의를 진행해야 할지

강사님께서 가늠하는 자기소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

그렇게 14명이 대학로 강의실에 둘러앉아 1강, 현대정치철학의 바울적 계기를 주제로 강의가 시작합니다.

첫날 강의는 8회차를 잇는 강좌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와 함께 읽을 참고도서들을 훑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사님에 의하면, 현대철학을 다루는 곳은 많지만, 바울을 현대급진철학자들과 연결시키는 강의는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지난 겨울학기 강의는 '자크 데리다와 바울'을 주목해서 깊이를 살피는 강의였다고 하면,

이번 봄학기 '바울과 현대철학'강의는 바울과 다양한 철학자들의 시선을 대응시키는 개론 중심의 강의가 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 이후로 '국가'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레 생긴 우리들은

국가는 무엇이며, 국가는 어디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때같은 아이들과 희생자들이 바다 속에 수장되면서도, 그 원인을 찾아 물을 수 없었던 오늘과 같은 상황에

사람들은 진실에 대한 갈증과 구체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지요.

밀양에 송전탑을 세우는 것도,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든다는 것도,

모두 국책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무자비하게 진행됐습니다.

공동체적 삶의 안전망과 생태계의 질서는 군사력과 법으로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밀양 할머니들의 '여기서 이대로 살게하라'는 부르짖음은 '국가'에 대한 개인과 주체의 의문, 그에 따르는 몸의 저항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렇게 평범한 국민과 시민, 보통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고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비가시적 존재이면서, 덩어리로 취급되었던 평범한 시민들이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갖게 되는 동시에 모두가 철학자이며 주체로 거듭나는 계기 중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민 또한, 이런 상황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덩어리로 취급되는 존재들이 분할되고, 몸과 공동체로서,

이미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삶. 이 우리에게 바울적 계기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니체는 바울을 예수를 제도화시킨 장본인이라고 했답니다.

니체가 바울을 생각했던 근대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할만하며 이것이 일반적인 시선이기도 했다하고요.

그렇다면 현재는 바울을 어떻게 볼것인가,에 대해서 예수의 급진성을 희석화한 바울,이라는 니체의 시선에

이의를 제기한 다양한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그보다도  급진적현대철학자들을 주목하는 것이 이번 강의의 주내용이 됩니다.

급진적 철학자들을 매개로 바울을 우회적으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기존에 알던 고착된 기독교 담론에서 말하는 바울을 넘어서, 동시대에 직관적이며 직접적인 사유의 매개로서 급진적 바울을 주목합니다. 

이것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기독교인의 끊임없는 현시대와의 소통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1.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적인 것은, 메시아주의와는 다릅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메시아로 살아갔고, 그 메시아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기독교 중심의 담론이 메시아주의라고 하면, 하나님으로 시작해 하나님으로 대단원이 종결되는 유대인의 사고관이야말로 메시아주의와 닮아 있습니다. 한편 메시아적인 것은, ‘끊임없이 반복’됨을 담보합니다. 그것은 메시아적 ‘사건'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사건 내지, 사건을 통합한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4.19혁명 이전에 한국에 독립과 혁명에 대한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4.19혁명 이후에 독립이 완성된 것 또한 아닙니다. 이러한 계기는 ‘주어지고', ‘소요되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며 선택할 수 없기도 하고, ‘연루되'는 모양과도 같습니다. 나를 가만 있지 못하게 하는 시간이자 그러한 계기입니다. 그런 사건들은 사건이  일어나는 실제 시간과 사건이 해석되는 시간이 다르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2. 신체/몸/공동체/교회.

교회에서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하나됨, 입니다. 예수를 머리로 한 몸 된 지체,는 유기적으로 묶여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을 머리로, 정신으로 심고 어떤 파트는 그 정신을 따르고 담습하며 담아내는 것,은 모이는 것과 흩어지는 것,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율)법/정의.

법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혁명의 사건이 일어날 때 전략을 역할을 은사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세우는 과정에서 내부의 분열과 갈등, 노선의 논쟁 등에 대한 고민이 뒤따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배려하라'는 말에서 ‘강한 자'는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사람,을 뜻하는데 당대에 강한 자에 대한 견해는 의견이 다양했다고 합니다. 시기에 따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강자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으며, 그런 상황을 읽으면서 법을 해석하고 삶에 위치시킨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잇게 합니다.


“정치적 바울은 논의의 성격과 방법론에서 신학의 방식과는 다르지만 ‘권력과 저항', ‘주권과 배제당한 자', ‘법과 정의' , ‘인민과 공동체' 등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역동성을 되살려내는 데 일정한 통찰을 줄 것이다. 바울이 던진 주요 개념들을 철학자들이 동시대의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파국적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가능한 사유를 제시하는지 고민해볼 것이다.’


2강에서는 사건과 진리 그리고 주체라는 세가지 핵심 키워드로 바울을 소개한 알랭바디우의 텍스트를 읽습니다.

정치철학자인 바디우는 무신론적 코뮤니스트인 자신의 입장을 '사도 바울'이라는 책에 담았답니다.

8강의 강의가 끝나기 전에 이 책은 꼬-옥,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강사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3강에서 소개하는 조르조 아감벤은 유대인과 이방인, 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안에서도 영적인 유대인과 육적인 유대인이 있으며, 이방인 안에서도 영적 이방인과 육적 이방인이 있음을,

그래서 그 층위를 구분하고 분리하는 태도를 취했답니다.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는 의문을 갖기 어려웠던 질문들이 새록새록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면, -해야지.’라는 당위 아래 묻혀진 비가시적 존재들을 주목하는 계기가 됩니다.

4강의 발터 벤야민, 자크 데리다는 ‘법은 정의를 이루는가?’ ‘정의가 법을 이루는가?’ 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법은 정의를 이루지만, 근본적으로 법은 폭력적이라는 게 벤야민의 시각입니다. 

법의 전제에는 강제의 속성과 굴복의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다시금 정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데리다의 입장입니다. 

바울이 율법 보다 하나님의 정의가 우선해야 한다는 점은 이와 닮아있습니다.

5강의 야콥 타우베스(유대철학자/사회학자), 카를 슈미트(정치신학자),

6강의 장뤽 낭시와 7강의 슬라보예 지젝과 바울을 곁들이며,

8강, 정치철학자들이 말하는 바울(바울 너머 바울)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생각할 거리들을 더해 총 8회 차의 강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2강부터 8강까지, 각 강의가 독립적 주제로 진행되고,

전체를 갈무리하는 바울의 이야기가 8강에 있으니 가능하면

끝까지 초반의 기운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덧붙이셨습니다 :-)


그 외 추가로 설명을 덧붙이신 참고도서로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아감벤의 ‘도래하는 공동체', 네그리의 ‘공통체'

김진호의 ‘리부팅 바울: 권리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정치철학적 견해 + 민중신학자 입장)

정정훈(수유너머/문화비평가)의 ‘인권과 인권들: 정치의 원점과 인권의 영속혁명' (‘인권도 서로 싸운다'는 관점)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강사님이 나눠주신 유인물 내용 중 함께 읽은 쪽글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과

월가 점령 시위 때 지젝이 기독교를 인용한 부분, 성령에 대한 내용을 찾아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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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런드 러셀은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개인의 영혼에 대한 강조와 영생의 의미가 어떻게 기독교의 사회적 미덕이 어떻게 기독교 윤리에서 배제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적 권력과 기회를 모두 박탈당하게 되면 그는 자연스런 행로에서 이탈하여, 우선 스스로가 착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선행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개인의 신성함'이란 개념으로 이어졌다. 신성함은 행동력에 있어 무능한 자들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미덕은 기독교 윤리에서 배제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고루한 기독교인들은 뇌물을 받는 정치가보다 간음한 자를 더 사악하게 여긴다. 후자보다 전자가 몇 천 배 더 큰 해를 주는데도 말이다.”’ _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영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 역사적 유물론이 신학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누구와 싸워도 그 게임은 승산이 있다. 오늘날 신학은 알다시피 보기 흉할 정도로 비쩍 마른 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_발터 벤야민  >  ‘신학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 신학이 역사적 유물론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누구와 싸워도 그 게임은 승산이 있다. 오늘날 역사적 유물론은 알다시피 보기 흉할 정도로 비쩍 마른 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_슬라보예 지젝


‘공산주의는 분명히 실패했지만, commons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여기 모인 우리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깨달아야 할 게 하나 있다. 기독이란 무엇인가? 성령이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책임을 가진 신자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된 평등한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임한 곳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저 건너편 월 스트리트에는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견인불발의 마음가짐뿐이다. 내가 염려하는 유일한 점은, 우리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간 뒤,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 때 우리 정말 대단했지" 하고 추억에 젖어 회상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여러분 자신에게 약속하라.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욕망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욕망하는 것을 실제로 추구하기를 두려워 말라.’ _슬라보예 지젝

연설문 전문: http://goo.gl/1TJzM

연설문 영상: 

1편 https://youtu.be/N0GqSeH18mY

2편 https://youtu.be/ULYzkcSFf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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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할때 이야기 나눴던 것처럼

이번 강의를 통해서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도

줄기를 잘 잡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렇기에 수용하고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더해졌으면 하는 맘이 생깁니다 :-)

다음 수업 전에는 같이 밥상 교제하면서

일상과 맞닿은 고민들, 이야기들 더 나눌 수 있는 기회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곧 또 뵙겠습니다. :)